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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李滉)의 적통(嫡統)을 이어받은 유서 깊은 고택
학봉종택(鶴峰宗宅)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풍산태사로 소재

학봉종택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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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한옥 마당은 굵은 모래가 깔려 있을 뿐 특별한 치장이나 수목을 찾아보기 힘들다. 대체로 마당은 일을 하거나 많은 사람이 모여 회합을 하는 데 이용되었기에 평평하고 넓은 것이 가장 큰 미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동의 학봉종택은 이런 전통적 한옥의 이미지와 다르게 푸르름으로 가득 차 있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거기에는 잔디가 곱게 펼쳐져 있고, 커다란 나무들도 적당한 간격을 두고 식재돼 있어 영화 속에서나 보던 외국의 저택에 들어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한다. 하지만 이 집에 서린 이야기들은 낭만적이라기보다 결연하다. 게다가 얼마 전에는 그동안 알고 있었던 사실과는 다른 영화같은 반전(反轉)의 역사도 밝혀졌다. 어쩌면 학봉종택이 서 있는 자리가 천년불패의 땅이라 오래 번성해 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부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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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봉종택 배치도

학봉부터 시작된 역사적 사건의 산실



의성 김(義城金)씨의 종가인 학봉종택은 되돌아 온 집이다. 처음 지어질 때는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으나 낮은 지대로 인해 침수가 잦아 김성일(金誠一, 1538~1593, 호 : 학봉(鶴峰))의 8대손 김광찬(金光燦)이 1762년 이곳에서 100m 정도 떨어진 현재 소계서당(邵溪書堂) 자리에 옮겨지었고 현재 학봉종택이 있는 자리에는 소계서당을 지었다 한다. 그러다 1964년, 다시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移建)하였는데, 이때 종택의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두어 소계서당으로 쓰도록 하였고, 기존의 소계서당을 개조하여 종택의 사랑채로 꾸며 사용하게 되었다.

“ 현재의 집터인 금계(金溪)는 이곳 사람들이 ‘검제(黔提)’라 부르는 곳인데, 조선 전기부터 천년 동안 결코 그릇된 일이 없을 명당 중의 명당으로 손꼽히던 곳입니다. 김성일 할아버지께서는 마흔다섯이 되시던 해에 지금의 터에 집을 지으셨던 것이지요.”
국내 굴지의 정보통신기업에서 경영자로 활동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문중을 돌보고 있는 종손 김종길(金鍾吉) 씨는 “잔디와 수목은 새로 집을 옮기며 심게 된 것”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조선 시대 대표 학자인 이황(李滉, 호 : 퇴계(退溪))의 적통을 이어받은 김성일 이후로 집안에서는 국가시험인 과거(科擧)에 합격한 사람이 셀 수도없이 많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무엇보다 먼저 그 흔적을 되짚어봐야 할 대상은 바로 김성일.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조정에 잘못된 보고를 올린 우매한 신하로만 알려져 있다. 그의 통신사 동료였던 황윤길(黃允吉)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는 지나친 확신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민심이 동요될 것을 우려한 김성일은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반대 입장을 피력하였던 것이라고 한다. 실제 임진왜란이 시작된 후, 류성용(柳成龍) 등은 흩어진 민심을 모으기 위해 그를 천거하였는데, 이는 그가 이황의 적통을 잇는 수제자이자 왕실이나 권력, 당파에 치우치지 않고 백성을 위해 직언(直言)을 하는 인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리가 일어나면 의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는 임시 벼슬인 경상도초유사(慶尙道招諭使)로 임명된 후에는 진주대첩(晉州大捷)을 총지휘하고 관군(館軍)과 의병을 함께 통솔하며 수많은 전공(戰功)을 남기고 진주성(晉州城)에서 순국하였다.
지금은 그저 넉넉하고 고즈넉한 고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학봉종택에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시대를 살아간 선조들의 얼이 지금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안동 학봉고택 입구

안동 학봉고택 입구

안동 학봉고택 분정판

안동 학봉고택 분정판

광활한 대청을 품은 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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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학봉고택 안채 대청

원래 ㅁ자였던 본채는 한쪽에 증축을 하여 巳자 형태가 되었는데, 이곳에는 현대식 화장실과 방을 두어서 편리성을 높였다. 안채의 오른쪽을 대청으로 꾸미고, 왼쪽에는 안방을 두고 끝에 부엌을 놓았다. 부엌은 천장 높이를 낮추고 위쪽에 고방(庫房)을 두어서 세간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대청이 집의 규모에 비하여 넓은 것은 제사가 많은 종택이기 때문이리라. 지금도 제사 때마다 각기 하는 일을 적어 놓은 분정판(分定板)이 대청 앞 벽에 걸려 있는데, 큰 행사가 있을 때는 자리가 모자랄 정도라고 한다. 안동 학봉고택 안채 대청

재구성된 공간, 사랑채

안동 학봉고택 사랑채

본채의 동편에는 사랑채가 있는데 마루만 돌출형으로 누마루 처럼 튀어 나와 있다. 사랑채는 우물마루를 중심으로 양측에 온돌방을 두고 앞면에 길게 툇마루가 있던 소계서당이었던 건물을 개조했다. 그 결과 왼쪽은 사랑방으로 꾸미고, 오른쪽은 사랑 마루방으로 만들었다. 사랑방 왼쪽에 작은 사랑방, 뒤쪽에 책방을 두었고 사랑채를 안채와 연결하였다. 사랑채와 풍뢰헌의 문창살 위에는 통풍을 위한 작은 창이 나 있는데, 본격적으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 조선 후기에 통풍을 위해 고안한 것으로 짐작된다. 연기가 위로 올라가면 방안의 온기를 유지하면서 환기를 시킬 수 있도록 한 선조들의 지혜를 볼 수 있다. 안동 학봉고택 사랑채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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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학봉고택 마당

이 집의 특징 중 하나는 전통적인 주택과 현대적인 정원의 공존이다. 전통 조경에서는 마당에 잔디나 나무를 많이 심는 것을 꺼려했다. 이런 이유로 별원(別園) 혹은 후원(後園)이 발달하게 되었으나, 학봉종택은 1964년에 위치를 이전하여 다시 건축하는 과정에서 매우 현대적인 모습의 정원을 도입했다. 덕분에 잘 가꾸어진 나무와 기암괴석을 넉넉한 풍경과 함께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정원에서는 정기적으로 고택음악회도 개최하고 있다. 안동 학봉고택 마당

보물이 가득한 집, 운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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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학봉고택 운장각

학봉종택 안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운장각은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곳. 운장(雲章)은 “저 넓디넓은 은하수(倬彼雲漢), 하늘에서 빛나고 있네(爲章于天)”라는 중국 최고(最古) 시집 「시경詩經」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운장각에는 왕에게 학술을 강의하고 토론한 내용을 기록한 「경연일기(經筵日記)」, 기행문인 「해사록(海.錄)」 등 김성일의 친필 원고와 안경, 벼루를 비롯한 그의 유품이 전시돼 있다. 또한 역사서인 「사기(史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같은 조선 초기 간행한 고서(古書) 56종 261점과 왕이 내리는 명령서인 교서(敎書), 군사 지휘권에 관한 명령서인 유서류(諭書類) 등의 고문서 17종 242점도 전시되어 있다. 특히 고서 중에는 국가지정보물도 있다. 안동 학봉고택 운장각

여행정보

여행정보
  • 하회마을
  • 병산서원
  • 영호루
  • 학봉구택
숙박정보
    • 풍뢰헌 매화실, 송죽실 별채로 사용하던 공간. 각 4인용
    • 큰사랑 손님을 모시거나 남자 주인이 기거하던 방. 4인용
    • 작은사랑 손님을 모시거나 기거하게 하던 방. 3용
    • 안방 집안의 안주인이 기거하던 방. 4인용
    • 상방 집안의 가장 웃어른(여성)이 기거하던 방. 2인용
    • 대문채 진달래실, 목련실 행랑아범이나 신분이 낮은 손님이 기거하던 방. 각 2용
    • 조식 가능 (숙박료에 포함)
    • 모든 방에서 취사 불가
    • 외부 화장실과 욕실 이용

숙박정보 보기

교통편
  • 승용차 이용시

    서안동IC → 안동 방향 → 경서로 → 송야사거리에서 봉정사, 서후 방면 좌회전 → 풍산태사로 → 의성 김씨 학봉종택 방면 우회전 → 학봉구택

  • 고속버스 이용시

    교보생명, 버스터미널 → 51번 탑승 → 금계, 검제

  • 기차 이용시

    교보생명, 버스터미널 → 51번 탑승 → 금계, 검제

주변 관광지

  • 01
    하회마을
    하회마을
    안동 하회 마을은 더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한 민속 마을이다. 낙동강이 마을을 휘감아 돌아가며 물돌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 하회마을은 풍산 류씨의 집성촌으로 지금도 마을주민의 70%가 류씨이다. 풍산 류씨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약 600여 년 전으로 류씨가 터를 잡기 전에는 허씨와 안씨가 먼저 이곳에 들어와 살고 있었다고 한다. 구전으로는 하회탈의 제작자가 고려 중엽의 허도령이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고 하며, 하회마을에서 강 건너 광덕동에는 허정승의 묘가 있어 해마다 류씨 가문에서 벌초를 하고 있다고 한다. 하회마을에는 이를 빗댄 "허씨 터전에, 안씨 문전, 류씨 배판"이라는 속언이 전해지고 있는데, 선주민들을 내몰게된데는 안씨집안의 딸 하나가 류씨집안으로 출가를 하면서 안씨 집안의 기운이 외손인 류씨들한테 이어져 씨족의 터전을 빼았기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자세히보기
  • 02
    병산서원
    병산서원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 말부터 사림(士林)들의 학문의 전당 이었다. 1613년 (광해군 5) 우복(愚伏) 정경세(1563-1633) 선생 유림의 공의로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존덕사(尊德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봉안했다. 1629년 선생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1582-1635)공을 배향했으며, 1863(철종14) 병 산(屛山)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868년(고종 5)대원군 서원철폐령이 내려졌을 때, 그 대상에서 제외된 전국 47개, 안동 2개소 중 한 곳이다. 자세히보기
  • 03
    영호루
    영호루
    오래전부터 안동의 영호루는 경남 밀양의 영남루(嶺南樓),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전북 남원의 광한루(廣寒樓)와 함께 한강 이남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불리어져 왔다. 창건에 관한 문헌이 없어, 언제 누구에 의하여 건립되었는지 잘 알 수는 없으나 천여 년 동안 그 이름이 전통의 웅부안동(雄府安東)과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의 영호루는 철근 콘크리트로 된 한식 누각이다.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으로, 북쪽 면에는 공민왕의 친필 현판을 걸고, 남쪽 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인 ‘영호루’를 걸었다. 내부에는 갑술년 홍수 때 유실되었다가 회수한 현액들과 새로 복원한 현액들을 게판하였다. 현재 게판되어 있는 시판은 12점이고, 제영 1점과 현판 2점이 있다.자세히보기

주변음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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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찜닭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안동찜닭’의 원조라 할 수 있는 곳. 간장과 캬라멜, 흑설탕을 비롯해 매운고추 등으로 양념을 한 매콤달콤한 맛이 일품. 양도 넉넉하고 맛도 좋아 안동을 찾는 여행객들에게 필수방문코스로 인식될 정도. 가게 앞에서 쉼 없이 만들어지고 있는 찜닭의 양을 가늠해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가 될 수 있는 곳이다.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남문동 181-7
  • 전화 : 054-854-6019
버버리찰떡

꼭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더라도 그곳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온 집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생겨 한 번쯤 먹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 버버리 떡집 역시 그런 곳이다. 70년 동안 찹쌀떡을 만들어온 버버리 떡집은 안동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주전부리를 만드는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버버리’는 벙어리를 뜻하는 경북 방언인데, 떡을 먹으면 너무 맛있어 벙어리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는 뜻에서 버버리 떡집이라는 이름을 짓게 됐다고 한다.

  • 주소 : 경상북도 안동시 옥야동 339-3
  • 전화 : 054-843-0106